궁중 수라상에 오른 장류: 조선왕조실록 속 장 담그기 기록

왕의 밥상을 완성한 것은 화려한 산해진미가 아니라, 한 종지의 장(醬)이었습니다. 조선 왕실이 장을 어떻게 담그고, 지키고, 나누었는지 사료를 따라 그 이야기를 풀어봅니다.

“장맛이 변하면 나라에 변고가 생긴다”

옛 어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장맛이 변하면 집안에, 나아가 나라에 큰일이 난다고요. 미신처럼 들리지만, 여기엔 깊은 이유가 있습니다. 냉장고도 조미료도 없던 시절, 1년 내내 밥상의 간을 책임진 것이 바로 간장·된장·고추장이었기 때문입니다.

장은 그저 조미료가 아니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사전에 인용된 표현을 빌리면, 장(醬)은 곧 장(將), 즉 **”온갖 맛(百味)의 대장(大將)”**이었습니다. 아무리 귀한 재료가 있어도 장맛이 나쁘면 맛있는 반찬을 만들 수 없다는 뜻이지요.

그렇다면 조선 음식문화의 정점에 있던 왕실에서는 장을 어떻게 다루었을까요? 놀랍게도 궁궐에는 장을 전담하는 관청, 전담 상궁, 그리고 자물쇠로 잠긴 전용 창고까지 있었습니다. 지금부터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사료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궁궐 속 장 창고, ‘장고(醬庫)’와 ‘장고마마’

궁중에서 장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는 궁궐 건축에서부터 드러납니다. 왕실은 장을 따로 보관하는 전용 창고인 **장고(醬庫)**를 두었습니다.

1824~1830년경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대형 회화 〈동궐도(東闕圖)〉(국보)를 보면, 궁궐 곳곳에 장독이 즐비한 장독대가 그려져 있습니다. 소주방(燒廚房), 수라간(水剌間), 생물방 같은 조리 공간과 나란히 장고(醬庫)가 여러 곳 표시되어 있지요. 창경궁의 경우 통명전 서쪽과 영춘헌·집복헌 뒤편 등 두 곳에 장고가 있었습니다.

경복궁을 그린 〈북궐도(北闕圖)〉에도 장고가 나옵니다. 서쪽 장고는 ‘예성문’을 출입문으로 삼아 담을 둘렀고, 내부에는 크고 작은 장독을 담근 연도별로 계단식 장독대에 배열했습니다. 큰 독에는 간장류, 작은 독에는 된장류, 항아리에는 젓갈류를 나누어 보관했다고 전합니다. 실제로 경복궁 함화당 서쪽 장고는 2001년 발굴을 거쳐 2005년 복원되었고, 2011년 일반에 공개되었습니다.

이 장고를 지킨 사람이 바로 ‘장고마마’라 불린 상궁입니다. 순종비 윤황후를 모시던 지밀나인 김명길 상궁의 구술을 담은 《낙선재 주변(樂善齋 周邊)》에는 생생한 증언이 남아 있습니다.

낙선재 뒤 장고에는 ‘장고마마’로 불리던 이완길 상궁이 있었다. 장고는 교실보다 큰 면적에 바닥을 높이고 벽돌담을 둘렀으며, 출입문에는 큰 빗장과 자물쇠를 채웠다. 장고마마는 옆 기와집에 살며 어린 궁녀(생각시) 두세 명을 데리고, 아침 일찍 몸을 정갈히 한 뒤 독을 반들거리게 닦고, 줄어든 장을 어린 장으로 늘 가득 채웠다.

평상시에는 문을 잠가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게 했고, 매년 길일을 골라 장을 담갔으며, 장맛이 좋기를 바라며 제를 지내거나 금줄을 치는 주술적 의식까지 행했습니다. 장 하나에 이토록 정성을 쏟았던 것입니다.

장을 관리한 관청: 내자시와 사도시

장고마마가 현장 실무를 맡았다면, 국가 차원의 물자 공급은 관청이 담당했습니다. 장·쌀·밀가루·콩·술·기름·꿀·채소·과일 같은 식재료를 관리한 곳이 바로 **내자시(內資寺)**와 **사도시(司䆃寺)**였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채소 관련 관청의 변천사입니다. 조선 초기에는 궁중 제사와 각 전(殿)에 쓰이는 채소의 재배·공급을 맡은 **침장고(沈藏庫)**라는 관청이 있었는데, 이 침장고는 폐지와 재설치를 반복하는 파란만장한 역사를 겪습니다. 태종 14년(1414) 폐지되었다가 2년 만에 재설치되고, 태종 17년(1417) 다시 폐지된 뒤 세조 12년(1466) 사포서(司圃署)로 개칭·병합되지요. 이렇게 실록의 날짜별 기사로 관청의 흥망을 추적할 수 있다는 점이야말로, 조선왕조실록이라는 사료가 지닌 힘입니다.

궁중 장의 종류: 청장·중장·진장

그렇다면 왕의 수라상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장이 올랐을까요? 궁중 간장은 숙성 기간과 색·농도에 따라 세 가지로 나뉘었다고 전합니다.

종류특징주요 용도
청장(淸醬)1년 정도 숙성한 맑고 담백한 장국 간 맞추기, 나물 무침
중장(中醬)중간 숙성, 두루 쓰이는 장일반적인 조리 전반
진장(陳醬)검은콩 메주로 담가 여러 해 묵힌 장. 조청같이 걸쭉하고 짙으며 단맛육포, 조림, 장김치, 약식 등

특히 검은콩으로 담근 진장은 임금님 수라상에 오르는 귀한 장이었습니다. 궁중 장의 또 다른 특징은 달이지 않고 ‘생장(生醬)’으로 썼다는 점입니다. 생장은 발효가 계속 진행되어 감칠맛이 더 풍부하지만 관리가 까다롭습니다. 그래서 해마다 새 장을 담가 묵은 장에 조금씩 보태는 ‘덧장’ 방식으로 맛과 양을 유지했습니다.

같은 콩과 소금으로 담근 장이 숙성 기간에 따라 색과 맛이 이토록 달라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열쇠는 장독 안에서 벌어지는 미생물의 활동에 있습니다. 이 변화의 원리가 궁금하시다면 된장 숙성 중 일어나는 발효 미생물의 과학편을 함께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수라상에서 장은 작은 종지에 담겨 올랐습니다. 청장, 초간장, 초고추장, 겨자장 등을 곁들여 국의 간이 부족할 때 더하거나, 전유화(부침)와 회를 찍어 먹는 데 썼지요.

메주는 어디서 왔을까: ‘절메주’의 비밀

여기서 재미있는 질문 하나. 궁궐에서 메주 띄우는 냄새가 진동했을까요? 답은 ‘아니오’입니다.

궁 안에서는 메주를 직접 만들지 않았습니다. 창의문(자하문) 밖의 메주 전문가나 사찰에 추수철 콩을 주어 만들게 한 뒤 진상받았는데, 이를 ‘절메주’라 불렀습니다. 봄에 검정콩을 삶아 띄운 것으로, 보통 메주의 4배가량 컸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하필 ‘절(寺)메주’일까요? 조선왕조실록사전은 이를 불교가 융성했던 고려시대에 절에서 메주를 만들어 궁중에 진상하던 법도의 흔적으로 봅니다. 실제로 고려 때는 메주만 전문적으로 만들어 전매(專賣)하던 절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매년 새 장을 담가 묵은 장에 보태는 방식은 왕실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종가에서 수백 년간 대를 이어 씨앗처럼 이어온 씨간장 역시 같은 원리로 관리되었는데, 그 대물림의 과학은 [종가에서 대물림되는 씨간장의 비밀]에서 자세히 다뤘습니다.

우리 장 문화의 뿌리는 훨씬 더 깊습니다. 중국 사서 《삼국지》는 “고구려인들은 장양(藏釀, 발효식품 담그기)을 잘한다”고 기록했고, 신라 신문왕은 683년 왕비를 맞을 때 납채(폐백) 품목에 장(醬)과 시(豉, 메주)를 포함시켰습니다. 장은 최소 삼국시대부터 이어진 유산인 셈입니다.

조선왕조실록사전은 궁중의 장 담그는 법이 『규합총서』의 기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것으로 봅니다. 이 『규합총서』와, 현존 최고(最古)의 조리 관련 문헌인 『산가요록』이 전하는 장 담그는 법을 구체적으로 비교한 내용은 [규합총서와 산가요록으로 보는 조선시대 장 담그는 법]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실록이 증언하는 장의 또 다른 얼굴: 구휼과 하사품

장은 왕실 밥상만 채운 것이 아닙니다. 실록을 읽다 보면 장이 백성을 살리는 식량이자 신하에게 내리는 하사품으로 등장합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구휼(救恤) 기록입니다. 세종·정조 때 굶주린 백성에게 나눠준 하루치 식량은 성인 1명당 쌀 4홉, 콩 3홉, 장 1홉이었고, 어린아이에게는 그 절반을 지급했습니다. 쌀·콩과 나란히 ‘장’이 배급 품목에 들어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장이 단순한 조미료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수 식량으로 취급되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실록에는 이런 기록도 있습니다. 1452년(문종 2), 문종은 도관찰사에게 야인(野人)들에게 지급한 “쌀·콩·소금·장(醬)의 수량을 상세히 아뢰라”고 명했습니다. 원문에도 “野人支給米、豆、鹽、醬, 具數以啓”라 하여 장이 국가가 관리하는 식량 물자였음을 분명히 보여줍니다(『문종실록』 2년 3월 8일).

고추장을 사랑한 임금, 영조

궁중 장 이야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조선의 최장수 왕 **영조(英祖)**입니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는 영조의 고추장 사랑이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특히 영조는 궁에서 담근 것보다 궁 밖에서 들여온 순창 고추장, 그중에서도 순창 사람 조종부(趙宗溥) 집안의 고추장을 유독 좋아했습니다. 《승정원일기》1761년(영조 37) 8월 2일 기사에는 **”予迨今未忘也(여태금미망야): 나는 지금도 그 맛을 잊을 수 없다”**는 애틋한 표현까지 남아 있습니다.

70대 중반, 입맛이 떨어질까 걱정하던 영조는 송이·생전복·고추장·새끼 꿩 네 가지를 별미로 꼽았습니다. 고추장 없이는 수라를 들지 못할 정도였다니, 그의 장수 비결에 발효식품인 장이 한몫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한 가지 덧붙이면, 순창 고추장의 제법이 언제 문헌에 처음 등장했는지는 학계에 논의가 있습니다. 흔히 숙종 때 의관 이시필의 《소문사설(謏聞事說)》이 거론되지만, 고추장 제법이 문헌에 확실히 나타나는 것은 1766년 《증보산림경제》부터라는 견해도 있어, 《소문사설》의 저술 시기를 둘러싼 이견이 존재합니다. 어느 쪽이든, 순창 고추장의 명성이 이미 조선 후기에 널리 퍼져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합니다.

장으로 완성한 궁중음식들

마지막으로, 이 귀한 장으로 어떤 음식을 만들었는지 살펴볼까요. 순종을 모신 마지막 주방 상궁 한희순이 전한 상추쌈 차림은 그야말로 ‘장의 향연’입니다.

절미된장조치는 쇠고기와 표고를 넣어 조린 된장 요리로, ‘절미(絶微)’란 더없이 미묘한 맛이라는 뜻이고 ‘조치’는 궁중에서 찌개를 이르는 말입니다. 약고추장은 고추장에 쇠고기볶음·꿀·참기름을 넣고 윤이 나게 볶은 것이며, 장똑똑이는 채 썬 쇠고기를 간장에 조린 반찬입니다. 병어나 웅어 살을 고추장에 끓인 감정은 오늘날의 고추장찌개에 해당합니다.

또한 1795년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에는, 혜경궁의 수라에 미나리·파·생선회를 찍어 먹는 용도로 고초장(苦椒醬, 고추장) 종지가 놓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200여 년 전 왕실 잔칫상에 고추장이 올랐다는 사실을 문헌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지요.

오늘로 이어지는 유산

조선 왕실이 자물쇠까지 채워 지켰던 장 문화는 오늘날에도 살아 있습니다. ‘한국의 장 담그기 문화’는 2018년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고, 이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가 추진되었습니다.

한 종지의 장 속에는 삼국시대부터 이어진 발효의 지혜, 왕실의 엄격한 관리, 백성을 살린 구휼의 마음, 그리고 임금의 소박한 입맛까지 모두 담겨 있습니다. 다음에 된장국 한 그릇을 앞에 두었을 때, 그 안에 흐르는 수백 년의 이야기를 한 번쯤 떠올려 보시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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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및 출처

조선왕조실록사전 「장(醬)」·「침장고(沈藏庫)」(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왕조실록』(문종실록 2년 3월 8일 등), 『승정원일기』, 『원행을묘정리의궤』(1795), 정혜경 「조선 왕실에서는 장(醬)을 담았을까?」(한식문화 칼럼), 김명길 《낙선재 주변》, 궁중음식 관련 상궁 구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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