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기 없이 이 감칠맛이 가능하다고?”
채식을 시작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부딪히는 벽이 있습니다. 바로 감칠맛입니다. 고기 육수, 멸치 국물, 생선 소스가 빠진 식탁은 왠지 밋밋하고 허전하게 느껴지죠. “채식은 맛이 없다”는 오해가 여기서 시작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반전이 있습니다. 이 문제를 이미 수백 년 전부터 완벽하게 풀어낸 조미료가 우리 부엌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된장, 간장, 고추장 — 한국의 전통 장류입니다.
콩과 소금, 그리고 미생물. 단 세 가지 요소만으로 육류에 버금가는 깊은 감칠맛을 만들어내는 이 발효의 기술은, 21세기 비건 트렌드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해답과 정확히 맞아떨어집니다. 오늘은 왜 전통 장류가 ‘가장 오래된 비건 조미료’인지, 그 과학적 근거를 하나씩 풀어보겠습니다.

1.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비건 시장, 그리고 ‘감칠맛 딜레마’
먼저 시장 상황을 살펴볼까요? 비건은 더 이상 소수의 라이프스타일이 아닙니다.
시장조사기관 자료에 따르면 2024년 기준 글로벌 비건 식품 시장 규모는 약 2,022억 달러에 달했으며, 2025년부터 2034년까지 약 2.5배 성장할 것으로 전망됩니다.¹ 또 다른 분석에서는 비건 식품 시장이 연평균 성장률(CAGR) 약 8.8~8.9%로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고 보고합니다.²
하지만 이 거대한 성장세 뒤에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숙제가 있습니다. 바로 “어떻게 동물성 원료 없이 깊은 맛을 낼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함정이 하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채소 우동, 떡볶이는 당연히 식물성이겠지”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점입니다.
한국비건인증원(KVCS)은 국물 요리의 깊은 맛을 내는 데 가장 흔히 쓰이는 재료가 ‘가쓰오부시(가다랑어포)’, 즉 명백한 생선 원료라고 지적합니다. 채소 우동, 메밀소바 쯔유, 어묵탕, 심지어 맛간장과 떡볶이 양념에도 생선 유래 육수가 ‘추출물’이나 ‘복합조미식품’ 형태로 숨어있는 경우가 많습니다.³
즉, 겉보기에 식물성 같아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조미료가 시장에 가득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전통 장류의 가치가 빛을 발합니다.
2. 된장·간장·고추장은 ‘태생부터’ 비건이다
전통 장류의 가장 큰 강점은 무엇일까요? 처음부터 식물성 원료로 설계되었다는 점입니다.
한국의 3대 장류인 된장, 간장, 고추장은 모두 **대두(콩)**를 기본 원료로 합니다. 여기에 고추장은 고춧가루와 찹쌀·엿기름이, 발효를 담당하는 것은 곰팡이(누룩)와 세균(고초균) 같은 미생물입니다. 어디에도 동물성 재료가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된장의 영양 구성을 보면 이 식물성 조미료의 저력이 드러납니다. 농촌진흥청 자료 기준 된장 100g당 단백질 13.7g, 지방 7.3g, 탄수화물 18.9g, 식이섬유 10.3g을 함유하고 있으며, 회분·철분·인·칼슘과 비타민(B1, B2, C, E 등)까지 갖추고 있습니다.⁴ 콩 발효 식품이 단순한 조미료를 넘어 식물성 단백질 급원으로서도 기능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실제로 전북대·광주여대 연구팀의 논문은 된장을 “단백질 급원 식품으로서의 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하며, 발효 과정이 대두의 거대 분자를 작은 분자로 분해해 단백질 흡수율을 높인다는 점을 짚었습니다.⁴
3. 감칠맛의 정체: 글루탐산이라는 ‘식물성 우마미’
그렇다면 고기도 생선도 없이, 어떻게 그 깊은 맛이 나는 걸까요? 핵심은 **글루탐산(glutamic acid)**입니다.
감칠맛(우마미, Umami)은 1908년 일본 과학자 **이케다 기쿠나에(Kikunae Ikeda)**가 다시마 국물에서 처음 규명한 ‘제5의 맛’입니다. 그는 이 맛의 정체가 아미노산의 일종인 글루탐산임을 밝혀냈습니다.⁵ 우리가 MSG(글루탐산나트륨)라고 부르는 그 성분이 바로 자연 발효 식품에도 풍부하게 들어있는 것이죠.
여기서 중요한 점은, 글루탐산은 원래 식물에도 풍부하다는 사실입니다. 다시마, 토마토, 버섯 같은 채소류에 자연적으로 존재하며, 콩 단백질을 발효시키면 이 글루탐산이 대량으로 생성됩니다.
전통 장류의 글루탐산 함량을 수치로 보면 그 위력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 발효 조미료 | 글루탐산 함량 (100g당) | 특징 |
|---|---|---|
| 된장 | 약 400~2,400 mg | 콩 단백질 분해로 생성, 숙성 기간에 비례 |
| 간장 | 약 800~1,500 mg | 액상이라 요리에 쉽게 녹아듦 |
| 다시마 | 약 2,200 mg | 대표적 식물성 감칠맛 재료 |
| 치즈 | 약 1,200 mg | (참고: 동물성) |
출처: 아미노산 함량 관련 자료 종합⁶⁷
특히 주목할 점은 된장의 글루탐산 함량이 오래 숙성될수록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전북대·광주여대 연구팀의 실측 결과, 명인이 제조한 전통 된장(CKT)에서 글루탐산이 2,423 mg/100g으로 가장 높게 나타났습니다.⁴ 이는 다시마에 필적하는 수준으로, 콩 단백질이 미생물에 의해 분해되며 감칠맛 아미노산이 축적된 결과입니다.
논문은 이 원리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된장의 깊은 풍미는 koji(Aspergillus oryzae)로 인한 콩 단백질 분해로 감칠맛을 지닌 아미노산이 풍부해져 오랜 기간 숙성될수록 향상된다.”⁴ 다시 말해, 미생물이 콩을 대신 ‘소화’시켜 육류 없이도 육류 같은 감칠맛을 빚어내는 것입니다.
4. 생선 소스를 대신하는 ‘비건 감칠맛 조합’
전통 장류가 훌륭하다 해도, 실전 요리에서는 액젓이나 어간장을 대체하는 구체적 방법이 필요합니다. 다행히 검증된 조합들이 있습니다.
감칠맛 시너지의 과학을 활용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글루탐산(다시마, 된장)과 이노신산·구아닐산 계열이 만나면 감칠맛이 산술적 합이 아니라 곱셈으로 증폭됩니다.⁵ 다만 이노신산은 주로 육류·생선에 있으므로, 비건 요리에서는 표고버섯의 구아닐산이 그 역할을 대신합니다.
실제 활용 조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어간장·액젓 대체: 국간장(조선간장)을 기본으로 하고, 다시마·표고버섯 우린 채수를 더하면 짭짤하면서도 깊은 감칠맛을 낼 수 있습니다.
- 멸치 육수 대체: 다시마 + 말린 표고버섯 + 무 + 대파 조합. 한국비건인증원은 이 식물성 재료들만 잘 배합해도 가쓰오부시 없이 충분히 진한 육수를 만들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³
- 감칠맛 폭탄 조합: 된장 한 스푼(글루탐산) + 말린 표고버섯(구아닐산)의 조합은 발효 감칠맛과 시너지 효과를 동시에 노릴 수 있는 비건 요리의 핵심입니다.
5. 비건 장류를 고를 때 반드시 확인할 것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장류라고 해서 무조건 비건은 아니다”**라는 사실입니다.
시판 된장·간장 중에는 풍미를 강화하기 위해 육수(base stock)나 향료를 첨가한 제품이 적지 않습니다. 앞서 인용한 논문의 성분 분석에서도, 시판 개량 된장 중 한 제품(CDT)은 원·부재료가 11종에 달했고 그중 **’기본 육수(base stock)’**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⁴ 반면 명인이 제조한 전통 재래식 된장(CKT)은 원료가 메주콩과 죽염, 단 2가지뿐이었습니다.⁴
따라서 비건을 지향한다면:
첫째, 성분표를 꼼꼼히 확인하세요. ‘육수’, ‘가쓰오’, ‘멸치’, ‘디포리’, ‘복합조미식품’ 표기가 있다면 동물성 원료가 숨어있을 수 있습니다. 둘째, 원료가 단순한 전통 재래식 제품을 고르면 대체로 안전합니다. 셋째, 확실하게 하려면 한국비건인증원(KVCS) 같은 공신력 있는 비건 인증 마크가 부착된 제품을 선택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나침반이 됩니다.³
6. 왜 지금, 전통 장류가 다시 주목받는가
전통 장류의 재발견은 단순한 향수(鄕愁)가 아닙니다. 그것은 지속가능성과 건강이라는 현대적 가치와 정확히 맞물립니다.
동물성 원료를 배제하면서도 감칠맛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고, 발효 과정에서 생성되는 항산화·항암·면역 증강 등의 기능성까지 보고되어 있습니다.⁴ 서구식 소스가 파고든 자리를, 오히려 가장 전통적인 조미료가 가장 미래지향적인 얼굴로 되찾아오고 있는 셈입니다.
콩 한 알과 소금, 그리고 시간. 우리 조상들은 이 단순한 재료로 육류 없이 깊은 맛을 내는 법을 이미 완성했습니다. 비건 트렌드가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지금, 어쩌면 우리는 가장 오래된 미래를 부엌 항아리 속에서 다시 꺼내 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참고문헌
- 베지뉴스(Vegan News), “비건 식품 시장, 10년 내 2.5배 성장 전망…’가격 장벽 낮춰야'”, https://www.vegannews.co.kr/news/article.html?no=207703
- Spherical Insights / Coherent Market Insights, 글로벌 비건 식품 시장 규모·전망 보고서, https://www.sphericalinsights.com/ko/reports/vegan-food-market
- 한국비건인증원(KVCS), “따끈한 국물, 떡볶이에 혹시?… 감칠맛의 정체 ‘가쓰오부시'”, https://www.vegan-korea.com/news/detail?seq=466
- 남동건·김지현, “고문헌 유래 재래식 된장의 제조 방법에 따른 품질 특성”, 한국식품저장유통학회지(Korean J Food Preserv) 28(2), 2021, https://www.ekosfop.or.kr/archive/view_article?pid=kjfp-28-2-169
- Ajinomoto / 우마미 인포메이션 센터, “우마미의 발견과 성분”, https://ko.umamiinfo.com/what/whatisumami/
- 네이버 블로그(gumgak1), “우마미 – 감칠맛(글루탐산 함량 비교)”, https://m.blog.naver.com/gumgak1/150135957866
- 국립농업과학원·농촌진흥청, 발효식품 아미노산 및 영양성분 데이터 (된장 영양 구성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