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필 가장 추운 때, 장을 담글까?
냉장고도 현미경도 없던 시절, 조상들은 어떻게 미생물의 생태를 꿰뚫고 겨울 장독대를 채웠을까
한겨울, 손이 시릴 만큼 추운 정월(음력 1월).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발효는 따뜻할 때 잘 되는 것 같은데, 우리 조상들은 왜 하필 일 년 중 가장 추운 이 시기에 장독대를 채웠을까요? 여기엔 단순한 관습을 넘어선 놀라운 과학이 숨어 있습니다. ‘장 담그기’는 2024년 12월 파라과이 아순시온에서 열린 제19차 유네스코 무형유산보호협약 정부간위원회에서 마침내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등재되며 그 가치를 세계적으로 인정받았습니다.¹ 그리고 그 지혜의 핵심에 바로 ‘계절’이 있습니다. 오늘은 왜 겨울이 장 담그기의 최적기인지, 고추장은 다른 장과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그 안에 담긴 미생물학적 원리를 하나씩 깊이 있게 풀어보겠습니다.

1. 조상들이 정한 ‘장 담그는 달력’
입동에 메주를 쑤고, 정월에 장을 담그다
먼저 전통적인 장 담그기의 시간표부터 살펴봅시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장 담그기의 전 과정은 크게 ‘메주 쑤기 → 메주 띄우기 → 장 담그기 → 발효·숙성 → 장 뜨기’의 순서로 진행됩니다.² 이 가운데 메주 쑤기는 보통 10~12월 무렵, 주로 입동(立冬) 즈음에 이루어집니다. 콩을 삶아 찧어 네모난 덩어리로 빚은 메주를 따뜻한 곳에서 띄운 뒤, 이 메주로 실제 장을 담그는 시기는 정월(음력 1월)부터 3월 무렵에 집중됩니다. 즉 장 담그기의 핵심 공정 전체가 일 년 중 가장 추운 계절에 촘촘히 배치되어 있는 것입니다.
지역과 문헌마다 다른 세밀한 시간표
흥미로운 점은 이 달력이 지역과 문헌에 따라 조금씩 달랐다는 사실입니다. 『농가월령가』에서는 11월에 메주를 쑤고 3월에 장을 담근다고 노래했습니다.² 지역별로도 차이가 있어, 제주도에서는 동짓달과 섣달 사이인 12월경에 장을 담갔고, 전라도에서는 정월 말날이나 2월·3월의 삼짇날에 장을 담그는 풍습이 있었습니다.² 이처럼 세부 시기는 저마다 달랐지만 관통하는 원칙은 하나였습니다. 메주 발효도, 장 담그기도 모두 추운 계절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단지 농사일이 없는 농한기라 시간이 남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 안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을 다루는 정교한 계산이 깔려 있었습니다. 아래에서는 그 계산의 실체를 하나씩 벗겨보겠습니다.
2. 겨울의 비밀 ①: 추위가 ‘잡균’을 막는 천연 방어막
발효의 가장 무서운 적, 부패균
장 담그기에서 가장 무서운 적은 무엇일까요? 바로 부패를 일으키는 잡균, 즉 유해 미생물입니다. 소금물에 메주를 넣어 몇 달간 발효시키는 과정에서 원치 않는 세균이 번식하면 장 전체를 통째로 버리게 됩니다. 한 해의 밑반찬과 국물 맛을 좌우하는 장이 상한다는 것은 곧 그해 살림의 근간이 흔들린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래서 조상들에게 잡균 관리는 그 무엇보다 절박한 과제였습니다. 여기서 겨울의 저온이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낮은 기온에서는 부패균의 활동과 증식이 크게 억제됩니다. 대부분의 부패균은 따뜻하고 습한 환경에서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때문에, 추운 날씨 자체가 일종의 천연 방부제이자 원하지 않는 균을 걸러내는 ‘선별 장치’로 작동하는 것입니다.
고추장과 속담에 남은 겨울의 지혜
실제로 고추장 담그기 경험을 정리한 자료들도 이 점을 강조합니다. 한 기록은 “고추장은 보통 11월부터 3월 초에 담그는데, 따뜻해지기 전에 온도가 낮은 음력 정월 즈음 담가서 골마지(표면 곰팡이)가 생기는 것을 최대한 막는다”고 설명합니다.³ 온도가 조금이라도 높아지면 표면에 곰팡이가 피기 쉬우니, 아예 가장 추운 시기를 겨냥해 위험을 원천 차단한 것입니다. 전통 세시풍속 속담에도 이 지혜가 녹아 있습니다. 민속 자료에 따르면 “2월은 남의 달이라 하여 장 담그기를 피한다”는 말이 전해지는데,² 이는 날이 풀리기 시작하는 시기를 경계한 조상들의 경험적 지혜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과학적 계측기가 없던 시절, 수백 년간 축적된 실패와 성공의 경험이 이렇게 속담과 관습의 형태로 응축되어 후대에 전해진 것입니다.
3. 겨울의 비밀 ②: 유익균은 ‘천천히, 깊게’ 일한다
추운데 발효가 될까? — 발효 과학의 절묘함
그렇다면 “추워서 잡균만 막으면 발효 자체도 안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자연스러운 의문이 생깁니다. 바로 여기에 발효 과학의 절묘함이 있습니다. 장 발효를 이끄는 주역은 콩 발효에 관여하는 바실러스(Bacillus, 고초균) 계열의 유익 미생물과 곰팡이입니다. 흥미롭게도 전통 장 담그기 문화를 정리한 자료는 “볏짚에는 바실루스 같은 장 발효에 도움이 되는 자연 유익균이 서식하여, 메주와 접촉하면서 자연 발효를 유도하고 잡균의 증식을 억제한다”고 설명합니다.⁴ 짚으로 메주를 묶어 매다는 전통 방식 자체가 유익균 접종과 잡균 억제라는 두 가지 목적을 동시에 달성했던 셈입니다. 조상들은 미생물의 존재를 몰랐지만, 짚이 좋은 장을 만든다는 사실만큼은 경험으로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미생물의 보고, 메주 — 그리고 ‘속도’의 미학
메주는 그 자체로 ‘미생물의 보고’입니다. 정책브리핑 자료에 따르면 메주에 존재하는 미생물 중 유산균 비율이 평균 약 30%에 달하며, 특정 메주에서는 유산균 비율이 최대 88%까지 나타나기도 합니다.⁵ 이 다양한 미생물군이 콩 단백질을 아미노산으로, 탄수화물을 당으로 서서히 분해하며 감칠맛과 풍미를 빚어냅니다. 핵심은 바로 ‘속도’입니다. 저온에서는 발효가 천천히 진행됩니다. 급하게 익히면 잡균이 끼어들 틈이 생기고 신맛이 강해지지만, 겨울의 서늘한 온도에서 천천히 숙성된 장은 잡균 없이 깊고 안정적인 맛을 갖게 됩니다. 마치 낮은 불에서 오래 고아낸 육수가 깊은 맛을 내듯, 발효도 서두르지 않을 때 비로소 층위가 풍부한 풍미를 완성합니다. 즉 겨울은 “유해균은 확실히 막으면서, 유익균에게는 충분한 시간을 주는” 완벽한 균형점인 셈입니다. 조상들은 이 미묘한 균형을 계절이라는 조건 하나로 절묘하게 맞춰냈습니다.
4. 소금 농도까지 계절에 맞춰 조절했다
늦게 담글수록 소금을 더 넣은 이유
조상들의 정밀함은 소금 농도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은 장의 적정 염도가 대략 18~20도 정도인데, “정월장이면 물 한 동이에 소금 석 되를 넣으며, 시기가 늦어질수록 소금을 더 넣는다”고 기록합니다.² 이는 대단히 과학적인 감각입니다. 날이 따뜻해질수록 잡균이 활발해지므로, 늦게 담글수록 소금을 더 넣어 방부 효과를 보강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일찍(추울 때) 담그면 소금을 덜 써도 안전하고, 늦게(따뜻할 때) 담그면 소금을 더 써야 한다”는 원리입니다. 정월에 담그는 장이 상대적으로 덜 짜면서도 깊은 맛을 낼 수 있는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온도와 염도, 이 두 변수를 계절이라는 하나의 축 위에서 함께 조율한 셈입니다.
달걀과 밥알로 염도를 재던 지혜
소금물의 농도를 맞추는 방법도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계측 도구가 없던 시절, 민간에서는 달걀을 소금물에 넣어 500원 동전 크기만큼 떠오르면 간이 맞은 것으로 판단했습니다.² 소금 농도가 높을수록 부력이 커져 달걀이 더 많이 떠오르는 원리를 경험적으로 활용한 것입니다. 옛 문헌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서는 흰밥 덩어리를 상수리만 한 크기로 만들어 소금물에 넣고, 떠오르는 정도를 보고 염도를 가늠하는 방법을 기록하기도 했습니다.² 오늘날의 염도계가 하던 일을 달걀 하나, 밥알 한 덩이로 해결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생활 속 지혜는 단순한 요령을 넘어, 부력과 밀도라는 물리 원리를 몸으로 체득해 활용한 경험 과학의 산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5. 고추장은 조금 다르다: ‘찹쌀’이 만드는 차이
담그는 원리부터 다른 ‘혼합형 장’
여기서 반드시 짚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고추장은 된장·간장과 담그는 원리가 조금 다르다는 것입니다. 된장과 간장은 메주를 소금물에 통째로 담가 몇 달간 발효·숙성시킨 뒤, 건더기는 된장으로 국물은 간장으로 갈라내는 방식입니다. 반면 고추장은 메줏가루, 고춧가루, 찹쌀(또는 엿기름), 조청, 소금 등을 처음부터 섞어 만드는 ‘혼합형 장’입니다. 서울식 전통 고추장 기록에서도 재료 배합을 중심으로 과정이 전개됨을 보여줍니다.⁶ 즉 된장·간장이 ‘통째로 담가 기다리는’ 발효라면, 고추장은 ‘여러 재료를 정교하게 배합하는’ 조합의 성격이 강합니다. 같은 장이라도 만드는 방식의 결이 사뭇 다른 것입니다.
달콤한 재료일수록 더 추운 때를 노린다
그런데도 고추장 역시 겨울에 담그는 것이 정석입니다. 왜일까요? 고추장의 주재료인 찹쌀과 엿기름은 당분이 풍부해, 온도가 조금만 높아도 표면에 골마지(흰 곰팡이)가 피기 쉽기 때문입니다. 앞서 인용한 자료가 “따뜻해지기 전 온도가 낮은 정월 즈음 담가 골마지를 막는다”고 한 것이 바로 이 이유입니다.³ 달콤한 재료가 많이 들어가는 만큼, 오히려 잡균과 곰팡이 관리에 더 신경 써야 하고, 그래서 저온의 계절이 더욱 유리해지는 역설이 성립합니다. 된장·간장이 소금의 방부력에 크게 의존한다면, 고추장은 당분이라는 잡균의 먹이가 많은 만큼 ‘온도’라는 방어선이 한층 중요해지는 셈입니다. 재료의 성질에 따라 위험 요소가 달라지고, 그에 맞춰 대응 전략도 세밀하게 조정했던 조상들의 통찰이 여기서도 빛을 발합니다.
6. 겨울 장 담그기, 실전 체크포인트
시기와 온도, 두 가지 핵심 변수
전통의 지혜를 현대 가정에 적용한다면 몇 가지를 기억해 두면 좋습니다. 첫째는 담그는 시기입니다. 메주는 입동(11월경) 무렵에 쑤고, 장은 정월(양력 2월경)에 담그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부득이하게 시기가 늦어진다면 앞서 설명한 원리대로 소금을 조금 더 넣어 방부력을 보완하면 됩니다. 둘째는 온도 관리입니다. 저온은 잡균을 막아주지만, 그렇다고 장이 얼어붙으면 발효 자체가 멈추므로 곤란합니다. 장독은 얼지 않는 서늘한 곳에 두는 것이 원칙이며, 낮에는 뚜껑을 열어 햇볕을 쬐어주는 전통 관리법인 ‘볕 쬐기’가 표면의 습기와 잡균을 방지하는 데 효과적입니다.² 저온 유지와 볕 쬐기, 이 두 관리가 겨울 발효의 성패를 가르는 실질적인 열쇠입니다.
정성을 모으는 하나의 의식, 손 없는 날
셋째는 ‘손 없는 날’의 활용입니다. 전통적으로 장은 손 없는 날이나 말날(午日)에 담갔습니다.² 여기에는 물론 민속 신앙적인 요소가 담겨 있지만, 동시에 온 가족이 날을 정해 정성을 모으고 위생적으로 준비하는 하나의 의식이기도 했습니다. 좋은 날을 골라 몸과 마음, 그리고 재료와 도구를 정갈하게 갖추는 과정 자체가 결과적으로 실패 확률을 낮추는 데 기여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장 담그기는 과학적 원리와 문화적 의례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종합적인 생활 문화였습니다. 요리와 푸드스타일링의 관점에서도, 이러한 배경 이야기를 알고 담근 장은 단순한 조미료를 넘어 그 자체로 하나의 서사가 됩니다.
마치며: 계절을 읽는 발효의 지혜
겨울에 장을 담그는 것은 단순한 관습이 아니라, 미생물의 생태를 꿰뚫은 조상들의 과학이었습니다. 추위로 잡균을 막고, 저온에서 유익균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며, 계절에 맞춰 소금 농도까지 조절하는 이 정교한 시스템은 냉장고도 미생물학 교과서도 없던 시절에 완성되었습니다. 문헌 속 세밀한 시간표, 달걀과 밥알로 염도를 재던 요령, 짚으로 유익균을 끌어들이던 지혜는 모두 수백 년의 경험이 빚어낸 결정체입니다. 『증보산림경제』는 “장은 모든 맛의 으뜸”이라 했습니다.² 그 으뜸의 맛은 결국 계절을 읽고 시간을 기다리는 지혜에서 나온 것입니다. 유네스코가 인정한 ‘한국의 장 담그기 문화’의 진짜 가치는, 바로 이 자연과 미생물, 그리고 인간의 정성이 만나는 겨울 장독대 위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참고문헌
- 유네스코한국위원회 — 「한국의 장 담그기 문화」 인류무형유산 대표목록 등재(2024.12.3, 아순시온): https://unesco.or.kr/241205_03/
- 국립민속박물관 한국민속대백과사전 — ‘장 담그기’ 항목(메주 쑤기·시기·염도·볕 쬐기·손 없는 날 등): https://folkency.nfm.go.kr/topic/장담그기
- 고추장 담그기 시기와 골마지 방지 관련 기록: https://haidi-cooks.tistory.com/119
- 국가유산·무형유산 아카이브(볏짚 바실러스와 자연발효 유도): https://ichpedia.org/ich/detail?id=43434
-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 메주 내 유산균 비율 관련 자료(평균 약 30%, 최대 88%): https://m.korea.kr/news/policyNewsView.do?newsId=148703461
- 서울식 전통 고추장 재료 배합 관련 기록: https://m.blog.naver.com/fantasticpanda/2226547525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