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필 그 시기에 장을 담글까
한 해 농사를 시작하기도 전인 이른 봄, 정월(음력 1월) 무렵이 되면 시골 마을 곳곳에서는 장독대 앞이 분주해집니다. 겨울 내내 방 안에서 발효시킨 메주를 꺼내 소금물에 담그는 ‘장 담그기(침장·沈醬)’가 이 시기에 몰려 있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시기가 정월대보름을 전후로 한 절기와 시기적으로 맞물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조상들은 실제로 정월대보름 자체를 장 담그는 기준일로 삼았을까요? 정확히 말하면 조금 다릅니다. 전통적으로 장을 담글 날을 정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긴 기준은 대보름이 아니라 ‘손 없는 날’과 ‘말날(午日)’이었습니다(경향신문, 2025; 한국민속대백과사전). 다만 이 두 기준일이 대체로 정월 한 달 안에 몰려 있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장 담그기 풍습이 정월대보름과 같은 시기 전통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것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이 두 기준의 정확한 의미와, 왜 하필 이 시기에 장을 담그는 것이 과학적으로도 이치에 맞는지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손 없는 날’이란 무엇인가: 귀신이 없는 날을 고르는 지혜
‘손 없는 날’에서 ‘손’이란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악귀나 악신을 의미합니다. 즉 손 없는 날은 이런 나쁜 기운이 활동하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날로, 예로부터 이사나 혼례처럼 중요한 일을 치를 때 반드시 이 날을 골라 진행했습니다(경향신문, 2025). 장을 담그는 일 역시 한 해 밥상의 근간이 되는 중대한 행사였기 때문에, 조상들은 손 없는 날을 골라 메주에 소금물을 붓는 의식을 진행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미신처럼 들릴 수 있지만, 실제로는 “중요한 일을 아무 날에나 벌이지 않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정성을 다해 준비한다”는 삶의 태도가 담긴 풍습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말날’을 고르는 이유: 동물 이름이 붙은 날의 비밀
손 없는 날과 함께 자주 언급되는 또 다른 기준은 ‘말날(午日)’입니다. 한국의 전통 날짜 체계는 육십갑자(六十甲子)에 따라 각 날짜에 쥐, 소, 말, 개 같은 열두 동물의 이름이 순환하며 붙는데, 그중 말이 붙는 날을 골라 장을 담그는 풍습이 이어져 왔습니다(한국민속대백과사전, folkency.nfm.go.kr). 실제로 최근에도 이 전통은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데, 한 전통 장류 제조인은 2025년 우수(雨水) 절기이자 말날에 맞춰 장을 담갔다고 소개하며, 장을 담근 뒤 60일에서 90일 사이에 장을 가르는 과정(된장과 조선간장을 분리하는 작업)을 거친다고 설명했습니다(네이버 블로그, 발효 전문 콘텐츠, 2025). 왜 말날을 특별히 고집했는지에 대한 명확한 문헌적 근거는 다양하게 해석되지만, 말이 크고 건강한 동물로 여겨져 왔다는 점에서 풍성한 장맛을 기원하는 상징적 의미가 담겨 있다는 해석이 일반적입니다.

정월대보름과 장 담그기, 시기적으로 왜 맞물릴까
앞서 말씀드렸듯 정월대보름 자체가 장 담그기의 직접적인 기준일은 아니지만, 손 없는 날과 말날은 대부분 정월, 즉 음력 1월 안에서 여러 차례 반복해 나타납니다. 실제로 2025년 기준으로는 1월 중 손 없는 날이 18일, 19일, 28일이었고 말날은 25일로 소개된 바 있습니다(발효 전문 유튜브 콘텐츠, 2025). 정월대보름이 음력 1월 15일로 정해져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시기 전후로 장 담그기에 적합한 날들이 몰려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입니다. 즉 정월대보름은 장 담그기의 ‘기준일’이라기보다는, 한 해의 가장 큰 명절 중 하나로서 이 시기 전체가 ‘장 담그기 시즌’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절기라고 이해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왜 이 시기가 과학적으로도 이치에 맞을까: 저온 발효의 원리
민속학적 상징 이외에도, 정월 무렵에 장을 담그는 데는 분명한 과학적 근거가 있습니다. 장담그기(침장)는 메주에 소금물을 부어 발효·숙성시킨 뒤 액상 부분을 간장으로, 고형 부분을 된장으로 나누는 작업입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 이 과정이 삼국시대부터 이어져 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을 만큼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데, 겨울에서 초봄으로 넘어가는 이 시기에 장을 담그는 이유는 온도 관리와 직결됩니다. 너무 더운 시기에 장을 담그면 유해균이 급속도로 번식해 장맛이 시어지거나 상할 위험이 커지는 반면, 기온이 낮고 서서히 오르는 초봄에 장을 담그면 유익균인 고초균 계열이 천천히, 그리고 안정적으로 우세종을 형성할 시간을 벌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김장을 겨울에 하는 것과 같은 이치로, 저온에서 서서히 진행되는 발효가 결과적으로 더 깊고 안정적인 맛을 만들어낸다는 발효 과학의 기본 원리와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24절기 속에 담긴 조상들의 시간 계산법
한국의 전통 절기 체계인 24절기는 태양의 황경(黃經)을 기준으로 1년을 24등분한 것으로, 계절의 변화를 세밀하게 담고 있는 시간 체계입니다(위키백과; 조선일보, 2016). 조상들은 이 절기를 통해 농사와 생활의 리듬을 조율했는데, 장 담그기 역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우수(雨水)’ 절기는 양력으로 2월 중하순 무렵에 해당하며, 겨울 추위가 서서히 풀리고 눈이 비로 바뀌기 시작하는 시기를 뜻합니다. 실제로 많은 전통 장류 제조 현장에서 우수 절기와 말날이 겹치는 날을 특별히 좋은 날로 여겨 장을 담그는 사례가 확인됩니다. 이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오랜 세월 축적된 경험 속에서 “이 정도 기온과 습도라면 장이 가장 좋은 맛으로 익어간다”는 조상들의 데이터가 절기와 풍습의 형태로 응축되어 전해진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정리하며: 미신이 아니라 데이터였다
정월대보름을 전후로 손 없는 날과 말날을 골라 장을 담그던 풍습은, 겉보기엔 신비롭고 미신적인 요소로 보일 수 있지만 그 안에는 온도와 발효라는 명확한 과학적 근거가 숨어 있습니다. 조상들은 온도계나 미생물 배양기 없이도, 오랜 경험을 통해 “이 시기에 장을 담가야 가장 맛있는 장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실제로 손 없는 날과 말날을 계산하는 구체적인 방법과, 우수 절기 무렵의 기온 변화가 장맛에 미치는 실질적인 영향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겠습니다.
참고문헌 및 출처
발효 전문 유튜브 콘텐츠, “2025년 손 없는 날과 말날, 장 담그기 최적의 날짜”
경향신문, “‘손없는 날’은 아는데 ‘말날’은 뭔가요?”, 2025.02.13
한국민속대백과사전(folkency.nfm.go.kr), “장담그기” 항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encykorea.aks.ac.kr), “장 담그기” 항목
네이버 블로그, “2025년 장담그는날 장담그기 좋은 날 소금물 만들기 된장담그는방법”, 2025
위키백과, “절기” 항목
조선일보, “계절 변화 알리는 알람, ’24절기’의 모든 것”, 2016.0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