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장이 쿠키와 버거, 아이스크림까지 만났다면?
몇 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웠던 조합이 있다. 고추장을 넣은 쿠키. 그런데 2025년, 미국의 인기 식료품 체인 트레이더 조(Trader Joe’s)의 ‘올해의 레시피’ 우승작이 바로 허니 고추장 콘 쿠키 아이스크림 샌드위치였다.¹ 텍사스 휴스턴 매장 직원이 개발한 이 디저트는, 쿠키 반죽을 고추장에 굴려 겉면을 코팅하고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끼운 것이다.
한국인에게 고추장은 여전히 ‘비벼 먹는 장’이지만, 세계 시장에서 고추장은 이미 케첩·스리라차처럼 찍고, 바르고, 굽고, 심지어 디저트에도 넣는 만능 소스로 변신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고추장이 어떻게 전통 비빔장의 틀을 넘어 현대식 퓨전 소스로 재탄생했는지, 실제 기업과 셰프, 외식 브랜드의 개발 사례를 근거와 함께 살펴본다.

1. 출발점 — “비벼 먹는 장”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다
고추장의 세계화에서 가장 큰 걸림돌은 뜻밖에도 고추장의 사용법 그 자체였다. 한국인은 고추장을 밥이나 나물에 ‘비벼’ 먹지만, 케첩·칠리소스처럼 ‘찍어 먹는’ 소스 문화에 익숙한 세계 소비자에게 이 방식은 낯설었다.
CJ제일제당의 K-소스 담당자는 이 지점을 정확히 짚는다. “고추장을 비벼 먹는 용도로만 고집하지 않고, 케첩이나 칠리소스처럼 찍어 먹는 소스 문화에 익숙한 세계인들을 고려해 딥핑소스 형태로 발상의 전환을 시도했다”는 것이다.² 동시에 현지 소비자 입맛에 맞춰 매운맛의 강도를 낮추고 당과 산미를 높이는 현지화 작업이 병행됐다.
이 ‘발상의 전환’이 퓨전 소스 개발의 진짜 출발점이었다. 고추장을 ‘한식 재료’가 아니라 ‘발효 기반의 감칠맛을 지닌 범용 매운 소스‘로 재정의하는 순간, 응용의 문이 활짝 열렸다.
2. 기업 사례 — 현지화된 고추장 소스의 상용화
가장 체계적인 개발 사례는 대기업의 현지화 제품에서 볼 수 있다. CJ제일제당은 2000년대 후반부터 고추장을 ‘글로벌 핫소스’로 키우기 위한 전략을 세웠고, 그 결과가 구체적 제품으로 나타났다.²
미국 시장에는 **’Gotchu(갓츄)’**라는 재해석 소스를 출시했다. 한국 고추장의 정통성은 유지하되 미국 입맛에 맞게 재구성한 제품으로, ‘발효 기반의 감칠맛(umami)과 슬로우 히트(Slow Heat)‘를 차별화 콘셉트로 내세웠다.² 매운맛이 확 치고 빠지는 스리라차와 달리, 은은하게 퍼지는 매운맛과 발효의 깊은 감칠맛을 무기로 삼은 것이다.
베트남에는 발효 감칠맛과 은은한 매운맛을 강조한 ‘Hot Jang(핫장)’ 핫소스를 런칭했고, 중동·동남아 할랄 시장을 겨냥해서는 발효 과정의 알코올 생성을 억제하는 기술을 개발해 미국 IFANCA 할랄 인증까지 획득했다.² 이러한 노력의 결과, CJ제일제당의 장류·소스 제품은 총 48개국에 수출되며 매년 약 15%씩 성장하고 있다.²
여기서 주목할 기술적 근거가 하나 있다. 전통 장류는 발효식품이라 미생물이 생성되는데, 나라마다 통관·미생물 규격이 달라 수출에 제약이 컸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2017년 **’감균 고추장'(장류 미생물 저감화 기술)**을 국내 최초로 제품에 적용해, 각국의 법적 규격에 대응할 수 있게 됐다.² 퓨전 소스의 세계화 뒤에는 이런 R&D 기반이 깔려 있었던 셈이다.
3. 외식 브랜드 협업 — 버거와 초밥, 테이블탑 소스로
퓨전 소스의 가장 생생한 사례는 글로벌 외식 브랜드와의 협업에서 나온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쉐이크쉑(Shake Shack)의 고추장 버거다. 프리미엄 버거 브랜드가 고추장을 소스로 채택하면서, 고추장은 ‘한식당의 재료’가 아니라 ‘패스트 캐주얼 다이닝의 맛 포인트‘로 격상됐다. 이 밖에도 말레이시아 맥도날드의 ‘Spicy Korean 버거’, 하인즈(Heinz)의 인도네시아 ‘Korean Gourmet Chili Sauce’ 등 글로벌 대기업들이 고추장을 활용한 제품을 잇따라 선보였다.²
특히 흥미로운 사례는 영국의 대형 레스토랑 체인 Itsu다. CJ제일제당은 이곳에 해찬들 고추장을 활용한 테이블탑 소스를 공급했는데, 80여 개 매장에서 매주 1,000개 이상 사용될 만큼 반응이 좋았다. 더 놀라운 점은 레스토랑 오너가 먼저 입점을 제안했다는 것, 그리고 고추장 소스가 롤·초밥과도 잘 어울려 이를 활용한 신메뉴까지 개발됐다는 것이다.² 이는 고추장이 한식의 경계를 넘어 일식 퓨전에까지 응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4. 셰프와 소비자 레시피 — 무한 확장하는 응용법
전문 셰프와 일반 소비자의 레시피에서도 고추장의 퓨전 응용은 활발하다. 셰프들은 고추장에 간장, 설탕, 참기름, 식초 등을 배합해 서양 요리에 어울리는 다목적 소스를 만든다. 예를 들어 셰프 제트 틸라(Jet Tila)는 고추장 2큰술에 설탕·간장 등을 섞은 글레이즈·마리네이드용 소스 레시피를 공개한 바 있다.³
일반 소비자 레벨에서 최근 미국에서 크게 유행한 것이 **’고추장 버터(Gochujang Butter)’**다. 실온에 둔 버터에 고추장, 파마산 치즈, 다진 마늘, 쪽파, 꿀 등을 섞어 하루 굳힌 뒤 스테이크·빵·구운 채소에 바르는 방식이다.⁴ 흥미롭게도 이는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해외에서 자생적으로 탄생한 퓨전 레시피다.
이렇게 응용을 정리하면 크게 다음과 같은 방향으로 확장된다. 첫째는 딥핑·글레이즈 계열로, 치킨·튀김·바비큐에 찍거나 발라 굽는 용도다. 둘째는 드레싱·마리네이드 계열로, 마요네즈와 섞은 ‘고추장 마요’나 샐러드 드레싱, 고기 밑간용이다. 셋째는 컴파운드 버터·디저트 계열로, 고추장 버터나 앞서 소개한 고추장 쿠키처럼 단맛과 결합한 실험적 응용이다. 공통점은 고추장의 매운맛·단맛·감칠맛이 한꺼번에 담긴 ‘복합 풍미’가 다양한 요리의 맛을 입체적으로 끌어올린다는 것이다.
5. 성공 요인 분석 — 왜 하필 고추장인가
이토록 다양한 퓨전 소스가 고추장을 중심으로 개발되는 데는 명확한 이유가 있다.
첫째, 복합 풍미다. 대부분의 핫소스가 ‘매운맛’ 하나에 집중하는 반면, 고추장은 발효로 생긴 감칠맛과 곡물에서 온 단맛, 그리고 매운맛을 동시에 지닌다. 소스 하나로 여러 맛을 낼 수 있으니 응용 폭이 넓다.
둘째, 발효 기반의 감칠맛이라는 차별화 포인트다. CJ가 미국 시장에서 ‘umami’와 ‘Slow Heat’를 내세운 것처럼, 이는 스리라차·타바스코 같은 기존 핫소스가 갖지 못한 고추장만의 무기다.²
셋째, K-콘텐츠가 만든 인지도다. 담당자의 말대로 세계적 소스들도 인지도를 얻는 데 수십 년이 걸렸지만, K-푸드 열풍은 이 과정을 크게 단축시켰다. 밀레니얼 세대를 중심으로 새로운 맛에 개방적인 소비 트렌드가 확산되면서, 고추장은 약 3조 원 규모의 글로벌 핫소스 시장에서 ‘4대 핫소스’를 노릴 만한 위치에 올라섰다.²
마치며 — 조연에서 주연으로
고추장의 퓨전 소스 개발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단순한 수출 성공담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전통 재료가 자기 정체성(발효 감칠맛)은 지키면서 형태와 용법은 유연하게 바꿔 새로운 시장을 여는 과정의 교과서다.
비벼 먹는 장에서 찍어 먹는 소스로, 한식의 재료에서 버거·초밥·쿠키의 파트너로. 고추장은 한국 식탁의 조연에서 세계 식탁의 주연으로 무대를 옮기는 중이다. 그리고 그 변신의 핵심에는, 낯선 것을 익숙하게 만드는 ‘현지화’와 절대 포기하지 않는 ‘발효의 정체성’이 함께 놓여 있다.
이 글에 소개된 기업·제품·매출 관련 정보는 해당 기업의 발표와 언론·공공기관 자료를 근거로 한 것으로, 수치와 제품 현황은 발표 시점 기준이며 이후 변동될 수 있습니다. 특정 제품이나 기업에 대한 투자 권유나 보증이 아닙니다.
참고문헌 및 출처
- aT KATI(농식품수출정보), “[미국] 트레이더 조, 올해의 레시피로 ‘고추장 쿠키’ 선정해”(2025.8.26) — 허니 고추장 콘 쿠키 아이스크림 샌드위치 레시피 및 미국 내 고추장 활용 동향. https://m.kati.net/board/boardView.do?board_seq=103443
- CJ뉴스룸, “K-Sauce, 세계 식탁의 주연으로!” — CJ제일제당 K-소스 현지화 전략, Gotchu·Hot Jang·감균 고추장, Itsu 테이블탑 소스, 쉐이크쉑·맥도날드·하인즈 협업, 48개국 수출 등. https://cjnews.cj.net/k-sauce-세계-식탁의-주연으로/
- Jet Tila 셰프 고추장 소스 레시피 — 고추장 기반 글레이즈·마리네이드 배합. https://blog.schwanscompany.com/2016/08/chef-jet-tila-shares-sauce-recipe-using.html
- 고추장 버터(Gochujang Butter) 관련 레시피 및 해외 트렌드 보도 — 버터·파마산·마늘·쪽파·꿀 배합. (KBS ‘크랩’ 등 국내 보도 및 해외 레시피 커뮤니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