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문헌 속 장 담그는 법: 규합총서와 산가요록 비교

570년 전 조선 왕실 어의가 남긴 가장 오래된 요리책과,

200년 전 여성 실학자가 한글로 쓴 살림 백과사전.

두 고조리서에 적힌 ‘장 담그는 법’을 나란히 놓고 보면,

우리 장 문화가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가 선명하게 보입니다.


570년을 건너뛴 두 권의 요리책

지금 우리가 담그는 된장과 간장은 언제부터, 어떻게 만들어졌을까요? 놀랍게도 그 방법은 수백 년 전 문헌에 꽤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우리나라 장 문화를 담은 대표적인 두 고조리서를 비교합니다. 하나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요리책 『산가요록(山家要錄)』(1450년경), 다른 하나는 여성 실학자가 한글로 집대성한 『규합총서(閨閤叢書)』(1809년) 입니다. 약 360년의 시간 차를 둔 두 책을 나란히 놓으면, 우리 장 담그기의 원형과 그 변화를 함께 읽을 수 있습니다. (왕실에서 장을 어떻게 관리했는지 궁금하다면 [궁중 수라상에 오른 장류: 조선왕조실록 속 장 담그기 기록] 글과 함께 보시길 권합니다.)

『산가요록』 — 왕실 어의가 남긴 가장 오래된 요리책

『산가요록』은 조선 초기 세종 때 왕실 어의(御醫)를 지낸 전순의(全循義) 가 1450년경에 지은 것으로 전해지는,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조리서입니다.¹ 흥미롭게도 이 책은 오랫동안 사라졌다가 2001년에야 다시 발견되어 학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내용의 규모부터 방대합니다. 총 230여 종의 조리법이 담겨 있는데, 김치만 38가지, 술 빚는 법이 63가지에 이를 정도입니다.² 무엇보다 장에 관한 기록이 상세합니다. 메주 만드는 법, 장 만드는 법, 심지어 ‘장 맛 고치는 법’까지 기록되어 있고, 장의 종류도 간장·난장·청장·청근장·상실장·천리장·치장 등 다양하게 나옵니다.¹

산가요록이 알려주는 실제 레시피 — 「합장법(合醬法)」

가장 흥미로운 것은 실제 장 담그는 방법이 놀라울 만큼 구체적으로 적혀 있다는 점입니다. 산가요록의 「합장법(合醬法)」 원문을 번역하면 대략 이렇습니다.³

먼저 비율이 명확합니다. “메주 3말에 소금 1말을 기준으로 한다.” 요즘 레시피처럼 정량을 제시한 것입니다.

과정도 세밀합니다. 메주를 항아리에 1말 정도 덜 차게 넣고, 소금물을 가득 붓습니다. 소금물이 부족하면 매일 더 붓고, 메주가 떠오르면 손으로 눌러줍니다. “밤에는 덮어주고 낮에는 덮지 않는다”는 온·습도 관리 요령까지 담겨 있습니다.

특히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습니다. “장 담글 때 참기름 깻묵을 쪄서 찧어 항아리 밑에 두텁게 깔면 항아리 입구에 벌레가 생기지 않는다” — 이것은 오늘날로 치면 위생·방충 노하우입니다. 또 “메주가 1섬(10말)이면 항아리 바닥에 참기름 1종지와 활활 타는 백탄 숯불 3~4개를 넣는다”는 대목은, 지금도 장독에 숯을 넣는 풍습의 뿌리를 보여줍니다.

가장 인상적인 건 택일(擇日) 기록입니다. “장 담그기 좋은 날은 정묘(丁卯)일 및 모든 길신일(吉神日)이고, 나쁜 날은 신일(辛日)이다.”³ 570년 전에도 장 담그는 날을 길일로 골랐다는 증거입니다. (절기와 장 담그는 날의 관계는 [정월대보름과 장 담그는 날] 글에서 자세히 다룹니다.)

『규합총서』 — 여성 실학자가 한글로 쓴 살림 백과

시계를 약 360년 뒤로 돌려봅니다. 1809년, 조선 후기의 여성 실학자 빙허각 이씨(憑虛閣 李氏) 가 한글로 저술한 것이 바로 『규합총서』입니다.⁴

이 책의 가치는 여러 면에서 특별합니다. 첫째, 여성이 한글로 쓴 생활 백과사전이라는 점입니다. 당시 지식은 대부분 한문으로 기록되었는데, 빙허각 이씨는 일상 살림에 필요한 지식을 한글로 정리해 여성들이 실제로 활용할 수 있게 했습니다.

둘째, 단순 요리책이 아니라 가정 백과사전입니다. 음식 부분(‘주사의’) 안에 장 담그는 법, 술 빚는 법, 초 빚는 법, 밥·떡·차·김치·반찬 조리법까지 총망라되어 있습니다.⁴ 빙허각 이씨는 자신의 살림 경험뿐 아니라 『본초강목』, 『예기』 같은 여러 문헌을 참고해 근거를 밝히며 서술했는데,⁵ 이는 실학자다운 태도로 오늘날 관점에서도 신뢰도가 높은 서술 방식입니다.

셋째, 조선 후기 장 문화의 집대성입니다. 산가요록이 우리 장 문화의 ‘초기 원형’을 보여준다면, 규합총서는 그로부터 수백 년간 축적·정교화된 조선 후기의 장 문화를 담고 있습니다.

두 문헌을 나란히 놓고 보면

구분산가요록 (山家要錄)규합총서 (閨閤叢書)
저술 시기1450년경 (세종 32)1809년 (순조 9)
저자전순의 (왕실 어의, 남성)빙허각 이씨 (실학자, 여성)
표기한문한글
성격현존 최고(最古)의 조리서·농서가정 생활 백과사전
장 관련 내용합장법, 메주법, 장맛 고치는 법, 다양한 장 종류장 담그는 법을 살림 지식으로 정리
의의우리 장 문화의 초기 원형조선 후기 장 문화의 집대성
시간적 위치조선 전기 (출발점)조선 후기 (도달점)

산가요록은 ‘뿌리’, 규합총서는 ‘열매’다. 

360년의 간격을 두고 이어진 두 기록이,

우리 장 담그기가 오랜 세월 지속·발전해 온 전통임을 증명합니다.

두 책이 함께 증언하는 것 — 우리 장의 독창성

두 문헌을 관통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한국 장 담그기만의 독창적 방식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우리나라 장 담그기는 콩 재배 → 메주 만들기 → 장 만들기 → 장 가르기 → 숙성·발효로 이어지는 과정을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중국·일본과 뚜렷이 구별됩니다.¹ 특히 하나의 메주에서 된장과 간장 두 가지를 동시에 얻는다는 점, 그리고 전년도에 쓰고 남은 씨간장을 이어 쓰는 ‘겹장’ 방식은 한국만의 특징입니다.¹ (씨간장의 과학은 [씨간장의 비밀: 종가에서 대물림되는 장맛의 과학] 글에서 깊이 다룹니다.)

이런 유구한 역사와 독창성, 세대 간 전승 가치를 인정받아 ‘장 담그기’는 2018년 12월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¹ 산가요록과 규합총서는, 그 무형유산이 결코 근래에 생긴 것이 아니라 최소 570년 이상 문헌으로 이어져 온 전통임을 보여주는 확실한 물증인 셈입니다.

옛 문헌이 오늘의 부엌에 주는 것

산가요록의 “메주 3말에 소금 1말”이라는 비율, “밤에는 덮고 낮에는 덮지 않는다”는 관리법, 숯과 참기름 깻묵을 활용한 방충법은 지금 장을 담그는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지혜입니다. 규합총서가 여러 문헌을 인용하며 근거를 밝힌 태도는, 정보를 다루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무엇보다 이 두 책은 장 담그기가 단순한 조리가 아니라, 세대를 넘어 기록되고 전승된 문화임을 알려줍니다. 오늘 내가 담그는 된장 한 항아리가 570년 전 어의의 레시피, 200년 전 여성 실학자의 살림 지식과 이어져 있다고 생각하면, 장 담그기가 조금 더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을까요.


함께 읽으면 좋은 글

궁중 수라상에 오른 장류: 조선왕조실록 속 장 담그기 기록 — 문헌 속 레시피가 실제 왕실에서 어떻게 관리·소비되었는지 살펴봅니다.

씨간장의 비밀: 종가에서 대물림되는 장맛의 과학 — 두 문헌이 공통으로 언급하는 ‘겹장’의 원리를 과학적으로 풀어봅니다.

정월대보름과 장 담그는 날: 절기와 장류 문화의 상관관계 — 산가요록의 ‘택일’ 기록이 절기 문화와 어떻게 이어지는지 다룹니다.


참고문헌 및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장 담그기’ 항목 — 산가요록의 장 종류, 한국 장의 독창성, 2018년 국가무형유산 지정 등.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6963
  2. 한국민속대백과사전 및 위키백과, ‘산가요록’ 항목 — 조리법 230여 종, 김치 38종·술 63종 등 규모. https://folkency.nfm.go.kr/topic/detail/7717
  3. 한국식품연구원(KFRI) 전통식품백과, 산가요록 「합장법(合醬法)」 원문·번역 — 메주:소금 비율, 담그는 과정, 택일(정묘일·길신일), 숯·참기름 활용. (람쿡 전통식품 DB 수록) https://www.lampcook.com/food/food_dic_view.php?idx_no=8523
  4. 한국민속대백과사전, ‘규합총서’ 항목 — 1809년 빙허각 이씨 저술, ‘주사의’의 장 담그는 법 등. https://folkency.nfm.go.kr/topic/규합총서
  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규합총서’ 항목 — 본초강목·예기 등 인용, 가정 백과사전적 성격.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7298

※ 산가요록의 저자·연대는 ‘전순의, 1450년경 저술’로 전해지나 학계에서 세부 논의가 있는 부분이 있으며, 본문은 통설을 따랐습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