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간장의 비밀: 종가에서 대물림되는 장맛의 과학

항아리 하나가 1억 원이라는 말, 과장이 아니다

충남 논산의 한 종가에는 350년 넘게 대를 이어온 간장 항아리가 있습니다. 이 집안은 해마다 새로 쑨 메주로 ‘햇간장’을 만든 뒤, 반드시 그 위에 수백 년째 내려오는 ‘씨간장’을 부어 섞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간장 한 항아리의 가치가 1억 원에 이른다는 이야기가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놀랐습니다(헤럴드경제, 2024). 전남 담양 장흥 고씨 양진재 종가의 씨간장은 국내외 유명 셰프들의 발길을 이끌었고, 해남 윤씨 종갓집인 녹우당은 21대에 걸쳐 무려 600년 동안 씨간장을 이어온 사실을 처음으로 공개하기도 했습니다(한국일보 등 보도, 2023).

단순히 “오래됐다”는 이유만으로 이토록 귀한 대접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씨간장에는 명확한 발효 과학과, 그 과학을 지켜온 사람들의 정성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씨간장이 왜 특별한지, 그 뒤에 숨은 미생물학적 원리와 종가의 전통 방식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씨간장이란 무엇인가: 사전적 정의부터 정확히 알아보자

씨간장의 사전적 의미는 “햇간장을 만들 때 넣는 묵은 간장”입니다(중앙일보 쿠킹, 2024). 조상들은 잘 숙성된 간장을 매년 조금씩 남겨두었다가, 이듬해 새로 만든 간장에 부어 섞는 방식을 대대로 이어왔습니다. 이렇게 매년 씨간장과 햇간장을 섞는 작업을 ‘겹장’이라고 부르는데, 이 반복적인 과정을 통해 그 집안만의 고유한 균총과 향, 맛이 항아리 안에 고스란히 축적됩니다(중앙일보, 2023). 다시 말해 씨간장은 단순히 오래된 간장이 아니라, 세대를 거쳐 살아 있는 균이 계속 이어지는 ‘발효의 계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만드는 감칠맛: 씨간장의 발효 과학

씨간장이 특별한 이유는 감성적인 이야기 때문만이 아니라, 실제로 성분 변화가 과학적으로 관찰되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간장 속에서 발효를 담당하는 세균, 곰팡이, 효모의 수가 증가하고, 이 과정에서 감칠맛의 핵심인 유리아미노산의 함량이 눈에 띄게 높아진다는 사실이 여러 조리서 및 식품 전문 매체를 통해 소개된 바 있습니다(램프쿡 한식매거진, 발효음식 이야기 특집). 실제로 국내 식품 관련 학술 연구에서도 이와 유사한 결과가 확인됩니다. 한 연구에서는 재래식 메주로 만든 간장을 75일간 발효시키는 동안 초기에는 호기성 세균이 우세하게 나타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효모균의 비중이 증가하는 미생물 군집의 변화 양상을 규명했습니다(Choi 등, 1999, 한국식품과학회지). 또 다른 연구에서는 메주의 제조 기간에 따라 간장 속 젖산균과 효모균 수가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정량적으로 분석해, 메주를 만드는 계절과 기간이 최종 간장 맛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밝혀냈습니다(한국식품과학회지 논문, koreascience.kr).

즉, 씨간장을 매년 새 간장에 부어 섞는 ‘겹장’ 방식은 과학적으로 보면 그 집안의 고유한 발효 미생물 균주를 계속해서 계승·증식시키는 행위와 같습니다. 마치 사워도우 빵을 만들 때 오래된 발효종을 계속 이어받아 사용하는 것과 원리가 비슷한데, 한국의 씨간장은 그 역사가 수백 년에 이른다는 점에서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사례로 꼽힙니다.

왜 오래됐다고 다 씨간장이 되는 게 아닐까

여기서 흥미로운 지점이 하나 있습니다. 단순히 오래 두었다고 해서 아무 간장이나 씨간장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네이버 블로그, 발효 전문 콘텐츠, 2022). 종부(종가의 안주인)들이 매해 정성껏 관리하며 균의 상태와 염도, 보관 환경을 살펴야만 씨간장으로서의 품질이 유지됩니다. 발효 기간에 따라 간장은 햇간장, 청간장, 중간장, 진간장 등으로 구분되는데, 씨간장은 이 중에서도 오래 묵은 진간장 가운데 가장 맛이 좋은 것을 가리킵니다(동아닷컴 여성동아 보도). 시간이 흐르면서 염도는 상대적으로 낮아지고 발효로 인한 깊은 맛은 오히려 강해지는 것이 씨간장의 특징입니다(한식진흥원, 한식문화 매거진).

명인의 손끝에서 이어지는 전통: 메주부터 항아리까지

국빈 만찬 식탁에까지 오른 것으로 알려진 한 명인의 씨간장 제조 과정을 보면, 그 정성이 결코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품의 바탕이 되는 메주는 보통 동짓달(음력 11월)에 만들어지는데, 가을에 수확한 햇콩을 골라 길일을 받아 메주를 쑤고 발효시킨 뒤, 이듬해 정월(음력 1월)에 이르러서야 항아리에 장을 담그는 과정을 거칩니다(중앙일보, 국빈 만찬 씨간장 명인 인터뷰 기사, 2024). 이처럼 절기와 계절의 흐름에 맞춰 진행되는 전통 장 담그기 문화는 그 가치를 인정받아, 정부가 2022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신청 대상으로 ‘한국의 전통 장(醬) 문화’를 선정하기도 했습니다(한국전통식품협동조합, 2022).

참고문헌 및 출처

  1. 헤럴드경제, “한 항아리에 1억? 씨간장, 그 이상의 가치”, 2024
  2. 중앙일보, “美역사보다 오래된 전통 씨간장, 수백 년을 이어가는 비결”, 2024
  3. 중앙일보, “[라이프 트렌드&] 숨 쉬는 ‘맛의 결정체’ 왜 씨간장에 열광할까”, 2023
  4. 한식진흥원(hansik.or.kr), “옹기 채로 훔쳐간다는 씨간장, 씨간장이 뭐길래?”, 한식의 맛 장문화 매거진
  5. 한식진흥원(hansik.or.kr), “미국 역사보다 오래된 전통 씨간장, 수백 년을 이어가는 비결”, 발효음식 이야기
  6. 램프쿡(lampcook.com) 한식 매거진, 발효음식 이야기 스토리 아카이브
  7. 동아닷컴 여성동아, “발효 과학의 결정체, 미식가들이 씨간장을 찾는 이유”
  8. Choi 외, “장기숙성 한식간장의 숙성 기간별 품질 특성 비교”, 한국식품과학회지, 2019
  9. “메주의 제조기간에 따른 재래간장의 발효특성”, 한국식품과학회지, koreascience.kr
  10. 한국전통식품협동조합(kapft.or.kr), “씨간장과 장독대로 대표되는 ‘한국의 전통 장(醬)문화’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추진”, 2022

【체험 기록】 직접 만나본 발효 이야기

[2021년 4월경] 전통 방식 그대로 메주를 쑤고 장을 담가보았고, 그 과정에서 관찰한  눈과 손으로 확인하는 재미난 경험 몇 가지 이 작은 프로젝트를 사진과 함께 남겨봅니다.

① 메주에 핀 곰팡이, 강의할 때랑 실물은 또 다르더라

메주에 곰팡이가 피는 모양이 매년 똑같지가 않습니다. 이번엔 흰빛과 노르스름한 곰팡이가 잘 앉은 자리도 있고, 한쪽엔 거무스름한 곰팡이도 좀 껴 있었습니다. 이런 건 여러 번 겪어봐도 매번 볕과 바람, 그해 콩 상태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더군요. 검은 부분은 늘 하던 대로 마른 솔로 살살 털어내고 볕 좋은 날 한 번 더 말려줬습니다.

② 항아리에 소금물 붓던 날

메주가 충분히 마른 뒤 항아리에 장을 담그는 날, 계란을 소금물에 띄워 농도를 맞추는 방식은 늘 해오던 방법인데 이번에도 어김없이 몇 번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오래 해왔다고 해서 매번 감이 딱 맞는 건 아니고, 그날 물 온도나 소금 상태에 따라 조금씩 미세하게 조정이 필요합니다. 메주 옆에는 마른 홍고추도 함께 넣었는데, 잡균을 막아준다고 알려진 전통 방식을 이번에도 그대로 지켰습니다.

③ 숯 두 가지 방식으로 넣어보기

이번엔 숯을 넣는 방식을 두 가지로 나눠봤습니다. 붉은 망에 담아 물 위에 띄우는 방식 하나, 메주 옆에 바로 넣는 방식 하나. 그동안은 주로 한 가지 방식만 써왔는데, 이번 기회에 두 방식을 나란히 해보면서 숙성 과정에서 어떤 차이가 나는지 비교해보기로 했습니다. 고추를 X자로 겹쳐 올려두는 것도 늘 하던 습관인데, 나중에 항아리를 열어볼 때 그대로 있는지 확인하는 표시 역할도 겸합니다.

해마다 반복해도 늘 새로운 것들

같은 과정을 몇 년째 반복해도 매번 조금씩 다른 결과가 나오는 게 발효의 재미이자 어려움인 것 같습니다. 이번에도 검은 곰팡이 앞에서 잠깐 고민했고, 소금물 농도도 다시 몇 번 확인했습니다. 이런 감각은 아무리 오래 다뤄도 매해 항아리 앞에 서야만 다시 확인하게 되는 부분이더군요. 이 항아리도 시간이 지나면서 색과 향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계속 지켜보고 기록해보려 합니다.

이렇게 해마다 장을 담가오면서도, 종가에서 몇백 년씩 이어온 씨간장을 생각하면 여전히 감탄스럽습니다. 제가 담근 이 항아리도 몇 년, 몇십 년이 지나면 어떤 맛을 낼지 궁금해집니다. 다음 글에서는 이 항아리를 다시 열어보고 색과 맛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이야기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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